숨 가쁘게 달려온 2018년. 전역이었던 3월 12일은 대학에서 이미 강의 2주 차가 되어가는 날이었다. 덕분에 군대에서의 추억을 곱씹어볼 겨를이라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열차 안에서의 두어 시간뿐이었다. 고속열차의 속도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날 나는 오전에 전역식을 마치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기어이 오후 회로이론 수업을 들어냈다. 그리고 1학기를 마치고 따라왔던 포상 휴가 같았던 달콤한 여름방학을 마치 밀린 잠을 주말에 몰아 자듯 하염없이 늘어지게 보냈다.
행복하게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처음 연필을 쥐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월등한 성적표를 받아본 적이 있던가. 곱씹어 생각해보니 왜 나는 항상 모집단에서 고만고만했는지 점점 더 괘씸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 이 사실을 극복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2학년 2학기로 짧은 나의 인생사에 새 흐름을 불어넣고 싶었다. 새 마음가짐으로 임한 결과, ‘월등한 성적’이라는 초기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쉽게 만족할 줄 아는 나는 오른 성적에 기뻐했다.
오른 성적 덕에 어깨가 조금 들썩일 때쯤 다가온 겨울방학. 수석 경제 대국의 수도를 차석의 수도를 거쳐 들어왔다. 에어 차이나의 말도 안 되는 항공권 가격을 본다면, 이기적인 중국의 보호무역주의를 비난하고 싶다가도 얇은 지갑에 결국 ‘친중(親中)’이 되어버린다.
3년 전, 유럽 여행에서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서야 후회했다. 당시엔 ‘현실에 충실하자’라는 모토로 사진을 아껴 찍었다. 당시 나는 눈앞에 있는 날것의 좋은 풍경을 놔두고 사진만 줄곧 찍어대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무손실’ 저장은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몇 년 더 살아보니 타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일탈의 경험들이 사진을 통해 이후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활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의 광경을 기록을 통해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어쩌면, 더 큰 땔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구절절하지만 사실 사진을 많이 찍으면 나중에 자랑하기에도 좋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에 있는 동안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실 내 미국 방문의 주목적은 여행이 아니라 인턴 경험. 미국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친척, 레오의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이었다. 레오는 토종 미국인이기에 영어로 소통해야했다. 군 생활을 하며 영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미군들과 사적으로 많이 어울리지는 않아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나의 진짜 실력이 들통났다. 문장을 줄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군 시절 나는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걱정하며 갔지만, 결론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할 일이 정말 적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할 일이 많이 없어서 머쓱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로 페이’ 형 인턴쉽이었기에 내 몫을 하지 않는다는 부담이 크게 없었다. 그래서 틈만나면 이곳저곳 쏘다녔다.
내가 묵었던 곳은 미국 동북부, 메릴랜드주의 록빌(Rockville)이라는 도시. 한국으로 치면 서울과 분당쯤 되는 거리로 워싱턴 D.C와 지하철로 연결된 가까운 곳이었다. $2에 가까운 버스비와 $6에 달하는 적색 노선 운임 덕분에 가깝지만 한번 갔다 오면 교통비로만 왕복 $16 정도 들어 한국 대중교통 생각이 절로 나는 여정이다. 그래도 미국까지 왔는데 교통비가 무서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선진국을 체험하는 비용이다라고 생각하고 D.C로 자주 갔다 왔다.
하필 내가 머물던 1월 내내 미국 연방 정부는 셧다운(Shutdown) 상태였다. 이 사실을 한국에 있을 때 네이버 뉴스의 ‘세계’ 탭에서 기사를 접해 알고는 있었지만 ‘오호라~ 미국은 선진국이라 그런가 역시 삼권분립이 확실하구나’ 정도로 넘겼지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런. 셧다운 덕에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스미소니언(Smithsonian) 재단의 모든 박물관이 문을 닫아버렸다.
박물관이 문을 닫아버린 바람에 초조해진 나는 어디를 가야할까 인터넷을 뒤져보다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친 대한제국 공사관이 D.C 시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내가 누군가, 군사 외교관이라는 카투사 아니었나. 그렇게 내 첫 일정이 잡혔다.
운이 좋게도 나랑 같은 시간에 들어온 가족 일행이 큐레이터를 예약을 한 덕에 어부지리로 꼽사리를 껴서 같이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에 나름 제 역할을 했다고 하는 등 유교 탈레반 조선답지 않게 여성들이 진취적인 역할을 했단다. 양복을 관복으로 입기도 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도 많았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조국을 상기시키며 애국심이 고취될 때 쯤, 슬슬 배가고파졌다. 맛있다고 추천받은 인근 BGR Joint 버거집을 찾았다. 본고장에서 먹은 햄버거 맛은… 미안하지만 강남에서 먹은 쉑쉑버거가 더 맛있었다.
아메리칸 사이즈에 감탄을 하며 불룩해진 배를 부여잡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워싱턴에는 원형 공원이 참 많다. 원형 공원을 중심으로 보통 네다섯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뻗어있다. 그만큼 계획적으로 지어졌다는 뜻이겠지.
계획 도시인 만큼 워싱턴 D.C는 지하철이 참 잘돼있다. 악명이 자자한 옆동네와 달리, D.C의 지하철은 깨끗하다. 방사형의 노선은 체계적이고 배차간격도 짧다. 문제는 버스. 노선이 촘촘한건 좋은데 배차간격이 기본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이 넘는다. 그래서 날씨도 춥고 오들오들 떨면서 버스를 기다릴 바에 주변 구경도 할겸 그냥 걸어서 이동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링컨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에는 허무하리만치 하나의 석상이 전부였다. 큰 공간에 하나의 새하얀 석상,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멋진 문장. 이거면 충분하다.
링컨 기념관을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한국전쟁 기념 공원이 보인다. 우의를 입고있는 동상들을 보라. 당시 한국의 울창한 산악지대에서 맞이했던 장마 속 혹독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에 가려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도 부른다. 혹자는 한국전쟁이 ‘열강의 이권다툼에서 빚어진 소국의 비애’라고 표현한다. 나 또한 고등학교 때 비슷한 취지의 발표를 전교생 앞에서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이제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37,000명에 달하는 젊은이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준 미국의 개입이 고맙다. 적어도 내가 지금 미국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한국전쟁에 관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상황에, 70년 전 미군 또는 UN군의 결정이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이 점점 똑똑해지면서 이제는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산해준다. 이 날 Dupon Circle 역 - 대한제국 공사관 - 링컨 기념관 - 2차대전 기념비 - Dupon Circle 역 으로 이어진 코스에서 15km를 걸었단다. 이 날 집에 돌아와 쓰러지듯 누워 앞으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후로도 이런 날이 잦았다. 이렇게 착실한 보행자가 된 덕분에 아메리칸 사이즈 음식을 먹고서도 체중을 유지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하릴없이 보낸지 2주 차가 됐을 즘, 슬슬 사람이 그리워졌다. 같이 사는 누나 부부는 일하느라 바빴고 한국 사람들과는 시차가 10시간이나 나서 연락하기도 힘들었다. D.C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무 생각 없이 대학가를 가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걷고 또 걸어서 두시간 만에 조지타운 대학에 도착했다. 그냥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DC를 강 건너편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학식을 먹으러 갔다. 프랜차이즈 말고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학식을 먹고 싶어서 기웃기웃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사 먹을 수 있었다. 저 건강하고 맛없어보이는 볼 한 접시가 8불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아.. 미국!! 이젠 익숙하다.
방문 목적을 상기시키자. 이 먼 길을 온 이유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지. 접시를 받아들고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젊은 청년 세 명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용기 내 합석해 대화를 나눴다.
이후 한 달여가 지난 시점. 미국 교통안전국(TSA) 직원들이 셧다운의 영향으로 임금이 체불되고, 셧다운을 장기화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이 속출하고 악화한 여론에 압박을 느꼈는지 몰라도 트럼프가 셧다운을 ‘임시적’으로 풀어줬다. 덕분에 TSA 직원들도 환호했겠지만 나도 드디어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갈 수 있게 되어 슬며시 같이 환호했다.
21세기, 세계 최강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두말할 것 없이 미국이라고 답할 것이다. 미국은 경제 규모 자체로도 정말 대단하지만 나는 3억이 넘는 인구의 1인당 국민소득(GNI)이 우리나라의 두 배가량인 6만불이라는 것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엄청난 인구를 앞세운 중국에 단순 경제 규모(GDP)는 많이 따라잡혔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는 그 누구도 미국에 비견할만한 적수가 없었다. 우주 개발이 한창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급 두뇌들과 세계의 자본이 미국으로 쏠렸고 미국은 우주 개발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파편을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양한 발사체, 우주복 등이 원본 비율로 있었고, (실제 쓰이던 것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라이트 형제로 시작해 하늘을 날고 우주로 진출하기까지의 서사가 아주 좋았다. 입장료가 없음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아주 볼거리가 많았다. 2차 세계대전관이 셧다운 여파로 재개장을 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나는 전기전자 공학도로서 맥스웰(Maxwell)이 ‘보기 좋게’ 정리했다는 방정식을 1년 동안 공부했지만, 아직도 그 방정식을 보면 두통이 생기고 속이 메스껍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 힘겹게나마 암기한 공식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응용했음이 분명한데, 과연 우주선 하나를 달로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야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노력했을까 감히 가늠조차 어렵다. 경이로움과 동시에 나는 과연 발사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까 질문을 던졌고 택도 없었을 것 같다고 스스로 답변했다.
이과생들만 재미보란 법은 없는건지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을 나오면 국립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미국은 어딜 가든 오래된 ‘척’ 하는 건물 투성이다.
또 한 번 운 좋게도 큐레이터를 예약한 그룹에 슬며시 어깨를 들이밀어 같이 재미를 봤다. 파란 옷과 빨간 옷은 마리아와 예수를 상징함과 동시에 성스러움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작새, 소와 같은 다양한 동물들, 건축물에서 나오는 선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처리 모두 ‘논리적’으로 의도된 그림이라는 것을, 논리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당시의 유행이었다는 것 그리고 진리의 ‘결국 유행은 돌고 돈다’ 등등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제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미국에 두달이나 있었기에 심심한 나날 와중에 다양한 일이 있었고 다양한 곳을 갔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담아내기엔 글 쓰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나에게 너무 버겁다. D.C에서의 이야기는 이정도로 줄이고 다음 글에서는 짧게 갔다왔던 뉴욕 여행에 대해서 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