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수기는 2020년 1월간 아랍에미리트 원자력공사(ENEC) 인턴십을 마치고 난 후, 한양대학교 IAB(Industrial Advisory Board, 산업연계교육자문위원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모두가 창문을 걸어 잠그고 살을 에는 바람을 막으려 꽁꽁 싸맬 동안, 나는 적도 부근 포근한 바람이 부는 중동의 산유국 중 하나인 UAE(United Arab Emirates, 아랍에미리트)에 왔다. 내가 한 달 동안 머무는 곳은 ‘바라카(Barakah)’. 사우디아라비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UAE의 서부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이 바로 2009년, 한국이 UAE에 수주한 20조 원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4기가 분주히 공사 중인 곳이다. 1호기는 기나긴 여정 끝에 마지막 단계인 연료 장전(Fuel Load)만을 남겨두고 있고, 4호기까지 가동된다면 차후 UAE 전력 사용량의 25%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당시 국가 간 체결한 교류 협정 덕에 나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19명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인턴십을 통해 실제 원전 내부를, 그것도 중동의 인심 좋은 부국에서 한 달여간 보고 느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작년 겨울, 미국 국립표준연구원(NIST)의 David Lavan 위원을 인터뷰했을 때 그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학부 시절 기계공학을 배우던 그가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하여 얻은 값진 경험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계공학을 복잡한 수식과 이론으로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조악할지언정 실제로 눈앞에 움직이는, 본인이 발로 뛰며 구한 부품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보았더니 배움이 의무가 아닌 즐거움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그 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풀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배움은 부모님의 그늘 아래 사는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보답이었고 취직이라는 관문을 위해 견뎌야 할 역경이었다. 전기공학을 배우는 나는, 내 전공은 막연히 모터, 송배전, 변압기 따위의 것들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칠판 위의 분필 가루로, 프로젝터가 쏘는 스크린 위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가슴을 뛰게 할만한 것은 없었다.
보안 절차의 거름망을 통과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원자력 발전소에 들어갔다. 발전소 내부는 과연 웅장하고 복잡했다. 정체 모를 파이프와 전선이 늘비했고 곳곳에 적힌 경고 문구와 분주하게 덜덜거리며 굉음을 내는 덩치 큰 기계들이 존재를 과시하며 발전소 안으로 들어왔음을 실감케 했다. 우리는 좁은 통로를 따라 원전의 모든 공간을 돌아다녔다. 동시에, 동행한 현지 엔지니어가 큰 소리로 정체 모를 기계들을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뜨거운 물이 끓지 않게 큰 압력을 가하는 컴프레셔(Compressor), 열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터빈(Turbine), 원자로를 감싸는 1.37미터 두께의 외벽(Containment Building) 등…
무슨 말인지 몰라도 괜찮다. 요지는, 공학도로서 아주 흥분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아, 내가 배웠던 것들이 의미가 있었구나. 이런 멋진 것들을 배우는 전기공학을 선택하기 잘했다’라고. 감동을 받아 그 다음날부터 두 눈으로 확인할 것들을 더 의미 있게 보고 싶어 이론 수업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들었다. 그 중 백미였던 것은 각지에서 모인 기계공학, 전기공학, 원자력공학 세 전공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며 서로 부족한 배움을 토론하며 메운 것이었다. 기계과는 터빈을, 전기과는 모터를, 원자력과는 핵연료봉에 대해 각자 전공 지식을 뽐냈다. 모르는 분야를 간략하게나마 전해 듣고 다른 전공 학생들에게 내 분야를 알려주는 것은 은근한 재미가 있었다. 바로 앞, 살아있는 터빈과 모터를 보며 이야기했기에 우리의 가슴은 생기가 넘쳤다. 배움은 더이상 의무가 아니었다.
이제 유튜브를 통해 세계 어디서나 유수 석학의 강의를 무료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나도 선형대수학 과목을 MIT의 OCW(OpenCourseWare, 공개 강의)를 통해 권위자인 Gilbert 교수님의 강의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양질의 강의를 제공하는 것만이 대학의 역할일까. 물론 화면상의 교수자와 앞에 서 있는 교수자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으나, 이론적인 지식을 전달함과 동시에 대학은 학생들에게 경험을 제공하여 동기부여를 주는 매개의 역할을 겸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랬듯, 우아하게 돌아가는 모터를 보면 마음 설레지 않을 공대생이 없을 것이다.
지난 2년간 나는 많은 분야의 다양한 위원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말을 다듬었다. 학생 기자로서 그들의 말을 IAB 구성원들과 학생들에게 나르는 역할이지만 사실 각 분야의 권위자인 위원들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나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2년간의 경험으로 감히 그들의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자격을 나에게 준다면, ‘기본에 충실하되, 다양한 경험을 하라’ 정도로 줄이고 싶다.
IAB는 대학과 산업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탄생했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위원들의 말에, ‘살아있는 경험’이 차이를 줄이기 위한 해법 중 하나라는 David Lavan 위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