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의 약속을 향해 가던 길. 잠시 귀를 틀어막던 이어폰을 빼고 어디 쯤 왔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어라, 지하철 안내 음성이 바뀌었네. 과거보다 많이 자연스러워진 디지털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어설픈, 연결 마디가 어색한 컴퓨터 음성이었다. 그래 어디선가 기사를 본 것 같다. 새로운 것을 반영할 때마다 전문 성우를 쓰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비용적으로도 비효율적이란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비용을 아껴서 우리는 저렴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겠지. 이해하기로 했다. 맞아, 예전 영상을 보면 예전에는 지하철 토큰도 사람이 팔던 시절이 있었잖아. 이건 시대의 흐름일 거야.
맥도날드를 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라멘집을 가더라도, 공차를 가더라도 자동화 키오스크가 나를 반겨준다. 이것도 기사에서 본 것같아. 직원에게 최저시급을 주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기계를 쓰는 것이 가게의 운영에 도움이 된다나.
어라, 그런데 이제는 배달도 전화로 주문하지 않잖아. 마트 계산도 내가 직접 하잖아. 돌이켜보니 기름도 아버지가 직접 넣던 것 같은데. 박물관은 큐레이터 대신에 오디오 가이드가 개인 맞춤형 가이드를 해주고 더이상 동네 구멍가게의 아주머니를 보기 힘들어졌잖아. 뭐 어때. 이건 시대의 흐름이야, 전화 교환원도, 엘레베이터 안내원도 모두 사라졌잖아. 어쩔 수 없는 기술의 진보야.
값비싼 자가용에 스크래치가 나면 보험사 직원과 대면하고, 초등학생들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이젠 선생님의 엄숙한 얼굴이 아닌 경찰의 건조한 대답이 기다린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모두가 소외되지 않는 세상이 온 것이야. 누구나 손해를 굳이 감내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범죄 수사, 프로파일링이 고도화되어 이제는 연쇄살인마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연쇄살인마가 되기 전에 잡히니까. 치킨집은 저마다 최고의 레시피로 전국에 뿌리내려 사람들에게 안정적이고 맛있는 닭 튀김을 배달한다. 골목마다 깨끗하고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 편의점이 위치해있다. 아, 정말 편리하고 안전한 세상이 왔구나. 세상은 발전하고 있구나.
낡고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주홍빛 전등은 시퍼런 LED 전등으로 바뀐다. 신호등의 시인성도 발광 다이오드 기술 덕에 좋아졌다. 여름에는 건물마다 몸이 으슬해질 정도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기다린다.
다시 지하철. 모두가 저마다의 사각형 스크린에 빠져 무언가를 보고 있다. 이젠 세계 유수 석학의 강의를, 가장 뛰어난 코미디언의 개그를, 빼어난 외모에 청아한 목소리까지 가진 가수의 노래를 전 지구인이 손 위의 작은 세상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카스트라토의 공연을, 모짜르트의 연주를 소수 특권층이 누리던 것과 비교해 얼마나 공평해진 세상인가. 어쩌면 각 분야의 ‘가장 잘 하는’ 소수의 영상을 남기는 것이 소외된 이 없이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숙련 편향적 기술 진보’
명석한 두뇌와 기술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이 기술의 진보를 이끌 것이라는 말이다. 서서히 대체되어가는 사람들, 가령 키오스크 이전의 알바생들과 지하철 안내 성우들, 토큰 판매원, 엘레베이터 안내원 등이 꿰차고 있던 자리들이 기술이 진보됨에 따라 서서히 기술로 ‘대체’되고 갈수록 구글의 ‘개발자’ 또는 극소수의 ‘전문 경영인’과 같은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사실 구글의 개발자들 또한 안심할 수 없는데, 어느 시기에 간단한 코드를 짜는 개발자들이 AI에 의해 대체될지 모른다. 점점 그 ‘장대높이뛰기’의 장대는 높아질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의 직업이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는가. 모두가 대체될 위험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미래지향적인 사회인가. 누군가를 대체시키기 위한 기술의 진보라면, 진보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단순한 경제의 원리에 입각해 인건비를 줄여 원가를 싸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가치인가.
종국에 모든 사람들이 일할 필요가 없어지고 국가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사회를 상상해봤다. 사실 북유럽 국가들, 심지어 미국에서도 논의가 되고 있는 이 ‘기본 소득제’는 상당한 직업이 사라질 위험에 도사리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회가 싫다. 나는 이 시대를 과거 식민지 시대의 영국 상류층을 떠올리게한다. 소설 ‘레베카’를 보면 그들의 고민은 오로지 사교 파티에 입을 드레스, 다른 집안과의 결혼 따위의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상류층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이 마땅히 일을 하지 않고 재산을 관리하고, 사교에만 집중했음에도 무료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평민들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분명히 1950년에 비해 곱고 하얀 피부, 절대 더 척박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된 우리가 감히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유는 우리를 앞선 세대와 비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모두가 충분할지언정 기본 소득을 받는 세상이라면, 할일이 친구들과 노는 일밖에 없다면 과연 그 사회의 개인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일까. 그들은 누구로부터 비교우위를 느낄 수 있는가. 모든 성취감이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닌 단순한 오락에 머물러 있는 사회가 온다면 그 사회는 과연 2020년 현재보다 나은 사회인가. 주어진 노동을 하며 성취를 느꼈던 과거의 사람들과 비교해 미래의 사람들은 ‘헬조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