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서 늘어지던 교육 중, 교관이 질문시간을 갖기로 했다. 교관은 아프간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 군인이었다. 그 교관뿐만이 아니라 당시 훈련소에 있던 상당 수의 교관이 파병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 교관에게 전형적인 한국식 질문이 쏟아졌다. 첫사랑 이야기, 한국 음식 이야기, 어느 교관이 사격을 가장 잘하는지 등등.. 피곤해하던 교육생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간간이 웃음이 터져나오던 그 때, 장난기 많던 한 교육생이 질문했다.
"파병 중 몇 명이나 죽여봤나요?(How many enemies have you killed in the battlefield)"
질문을 듣고 교육생 절반은 궁금했다는 듯이 또는 흥미로운 질문이라는 듯 호응했지만 다른 절반은 그렇지 못했다.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것은 아닐지 절반은 숨죽여 교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교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자기가 다른 것은 몰라도 사격은 제일 자신있다고 능청스레 말하던 그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버렸다. 몇 초간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던 교관은 이내 그의 목청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욕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교육생들은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남은 군생활 동안 상대방의 파병 이야기는 쉽게 물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더이상 교육생을 나무랄 어휘가 남아있지 않았을 때 비로소 교관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성을 가까스로 되찾은 그가 찬찬히 말해주었다. 그는 파병에서 최소 한 명의 적군을 사살한 경험이 있었고, 그 때의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최악의 것이었다고.
어려운 이름 대신 첫 글자를 따서 "U" 라고 불리던 다른 교관이 있었다. 항상 썬글라스를 끼던 그가 가끔 벗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의 멍한 눈빛과 늘 떨고있는 손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는 공허해 보였다. 그는 쉴 틈이 없는 요란한 헤비메탈 노래를 크게 틀곤 했는데, 그 정신없는 노래를 그는 듣는둥 마는둥 표정 없이 들었다. 질문시간에 특이한 이 "U" 교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물어봤는데, 질문을 받고선 교관은 동료인 "U" 교관이 파병 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가 생겨 그런 것 같으니 자극할만한 질문을 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멍청한 질문에 이성을 잃었던 교관을 보았다. 두 번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반면교사로 훈련소를 수료할 때까지 "U"교관에게 많은 말을 붙이지 않았다. "U" 교관은 이렇듯 무언가 불안해 보이고, 마음이 비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후반기 교육의 3주차가 되면 훈련의 수료를 판가름하는 마지막 체력 검정이 실시된다. 나는 체력 검정 중 마지막 코스인 2마일(3.2km) 달리기를 앞두고 말을 아끼던 U 교관이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본인은 2마일 달리기를 하고 나면 무조건 토를 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본인의 한계치까지 몰아 붙이며 내달리고, 토를 한다는 것은 한계치에 다달했다는 증표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4년 간 수 백, 수 천키로를 더 달리며 나는 U 교관이 말해준 증표를 도달하려고 노력했으나 단 한 번도 구토를 할 수 없었다.
오늘 나는 매우 심란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요소들, 취업 그리고 진학에서 오는 불확실성과 나의 미래, 내가 지금까지 이뤄왔던 것들 등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그저 주어진 일정에 따라 늘 달리던 코스를 달리기로 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와 연휴를 전후로 운동을 쉰 탓에 힘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오늘 나는 평소의 코스를 넘어 더 멀리 뛰고도 더 빠른 페이스로 뛸 수 있었다. 바로 달리면서 계속 떠오르는 심란한 것들이 나의 육체적인 고통따위는 우습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쁜 생각들을 잊으려 다리를 채찍질했고 그 생각들이 없어질 정도로 정신이 없어질 때까지 머리를 쳐박고 내달렸다. 나의 안녕을 갉아먹는 고민들이 주춧돌이 되어 나를 더 몰아붙인 것이다. 달리기를 마치고 저 멀리 잊고 있었던 "U" 교관이 떠올랐다. 그의 주춧돌은 무엇이었을까. 생기를 잃어버린 그의 마음을 몰아부쳤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마지막 1키로를 남기고 점점 메스꺼워지는 속을 느끼며 나는 정말 기뻤다. 내 마음을 혼란하게 하던 것들을 넘어서 육체의 신호에 이상한 희열을 느낀 것이다. 오늘은 꼭 해내리라. 발목이 부러질세라 내달렸지만 결국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오늘도 난 구토를 하지 못했다. 내 주춧돌은 아직 "U" 교관의 그것보다 작았던 것이다.
오늘 나는 잠을 잘 수가 없다. 스스로를 몰아붙일 수 없는 나에게 너무나도 실망하고야 말았다. 나는 대학원에 가서도 고만고만한 연구자가 될 것이다. 취직을 해서도 그저 그런 사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족적을 남기고 싶었는데 흉내밖에 낼 수가 없다. 나의 주춧돌은 너무 약하다. 잠시 심란했던 기분으로는 부족하다. 내 마음을 보이지 않는 반대편 끝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을 나는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