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기업은 만 3~4년 이상 경력이 쌓이면 경력 채용의 문을 열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올해로 만 경력 3년이 되어 이제 다른 기업으로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이직하면서 다시금 깨닫는 것은, 삼성전자와 같이 대규모로 대졸 신입사원을 공채로 뽑는 회사들은 우수한 인재를 데려가기 위함도 있지만, 그 공채 자체가 사회공헌활동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는 게 아닐까 한다. 이 바닥에서 백지상태의 신입사원을 뽑아 귀찮은 반복성 잡일이라도 제대로 시키려면 적어도 1년은 조신하게 배워야 한다. 내 느낌상(?) 회사가 한 명의 신입사원에게 투자한 비용을 뽑아내려면 경력 3년 정도가 손익분기점이라고 생각하는데, 1년은 보고 듣기만 하고 2년 정도 좁은 분야의 코드를 반복해 들여다보고 이슈를 대응하다 보면, 그 모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축적된다. 이제 슬슬 밥값을 하면서 자기만의 확고한 분야가 생기는 시점. 선배들도 간혹 가다 그 모듈에 한정하여 3년 경력의 사원에게 어느 정도 조언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실컷 제련하여 사람 구실 하게 된 인력이 나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회사는 다시 처음부터 사람을 뽑고 1년 간 이론 교육을 시키고 2년 간 선배들이 담금질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회사에 미안한 감정도 든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하는걸.
물론 대기업이 사회공헌활동으로만 공채를 뽑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현대자동차, 하이닉스와 같은 여타 굵직한 회사가 사실상 수시 채용으로 변할 때 삼성전자만 유일하게 공채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봉경쟁력에 있었다고 본다. 전기/전자/컴퓨터공학를 전공한 임직원들 입장에서, 삼성전자 외에 딱히 처우를 크게 개선하여 이직할 대안 회사가 없었다. 이렇듯 어차피 나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 지식은 무디지만 잠재력이 충만한 신입사원들을 뽑아 교육해 오래 뽑아먹는다는 생각은 꽤 합리적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연봉경쟁력이 있을 때까지 말이다. 연봉경쟁력..
그렇다. 머리가 좀 커지니 연봉 때문에 회사에 대한 불만이 살금살금 싹트기 시작했다. 연봉경쟁력을 잃은 이유는 메모리 반도체가 유례 없는 다운턴을 맞이하면서 회사가 급속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해당 시기를 지나며 돈도 돈이지만, 근본적으로 이 회사가 어쩌면 나의 평생직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와 무관하게 내가 살아남으려면 나만의 능력이 있어야 했다. 자연스레 나의 객관적인 경쟁력을 점검하고 싶었다.
국내 반도체 업계와 달리 자동차 업계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의적절하게 현대자동차에서 새롭게 자체 개발 고성능 칩을 만든단다. 시장과 시대의 부름을 받고 SDV(Software Defined Vehicle)을 한단다. 경영진이 머리를 굴려본 결과 차량 중앙에서 다양한 센서의 신호를 제어하는 고성능 칩은 테슬라처럼 자체 설계를 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을 했나 보다. 판교에 새롭게 둥지를 틀어 디지털 칩 설계/검증하는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삼성전자에서도 꽤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 현대자동차면 막연하게나마 좋은 회사임을 모두가 알지 않나. 취준생 시절 현대자동차 2차 면접을 불참한 큰 이유 중 하나는 경기도 화성시의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에 위치한 남양연구소의 위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판교에서 모집을 한단다. 당장 지금 집에서도 출퇴근할 수 있고, 앞으로 나의 미래를 그려봤을 때 위치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현대자동차가 갑자기 인력을 빨아들이는 이 시점이 마치 나에게 주는 절호의 기회만 같았다. 잘 나가는 이 업계에 편승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아닐까? 공고를 열어봤다.
정말 아쉽게도 채용공고에는 8년 이상의 경력 사원만 뽑는다고 했다. 3년 경력인 내 경력은 너무 초라한, 큰 차이었다. 시간 낭비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토가 있었다. 요구하는 자소서 분량이 짧기도 했고 CV는 항상 업데이트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 호기심에 넣어나 봤다.
다음날 메일 한 통이 왔다. 언뜻 보고 당연히 ‘경력 갭이 크니 하루 만에 떨어뜨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해당 공고가 경력 8년 이상에서 3년 이상으로 바뀌었으니 확인하라는 내용이 아닌가. 이거 설마 나를 의식한 건가? 나의 원서를 보고 굳이 저연차 경력사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또는 내 이력서가 매력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래 지나지 않아, 면접 일자가 잡혔다.
사전에 제공해 준 면접 문제가 내가 평소에 하던 일과 아주 많이 겹쳐서 수월하게 준비해 갔다. 개인적인 질문도 수월하게 답했다. 다만, 미리 보내 놓은 발표 자료에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과한 워딩으로 양념을 쳐놔서 그 부분을 기술적으로 파고들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면접이 끝나고, 생각보다 깊게 물어보지 않아서 안도했다. 2차 면접 일정이 이른 시일에 잡혔다. 2차 면접은 임원 한 명, 인사팀 한 명과 진행했는데, 인성 면접에 가까워서 수월하게 답했다. 한 시간의 면접 중 절반에 걸쳐서 같은 질문을 다른 말로 바꿔가면서 했다.
2차 면접 임원: "이력서 상으로도 그렇지만 면접을 봐 보니 연차에 비해서 수준이 높네요. 삼성전자에서 저연차임에도 인정받고 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굳이 현대자동차로 이직하려고 하나요?"
솔직히 기술적인 부분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내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캐치하고 더 파고들었던 것 같다. 당연히 해당 질문을 대비하여 ‘자동차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부서에서 도전을 하고 싶다’라는 전략을 준비해 갔는데, 썩 만족스러워하지 않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가 아니니까. 사실 나는 현 회사의 연봉에 대한 아쉬움과 나의 경쟁력을 시장에서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애매한 대답을 뒤로 하고 면접이 끝났다. 반신반의 했다.
이틀 뒤, 합격 소식을 들었다.
연봉 협상이 시작됐다. 경력 8년 이하 사원 대리급은 현대자동차 내부 테이블을 따라간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인사팀이 제시한 연봉은 썩 매력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올해 현대자동차의 성과급이 삼성전자 DS 부문보다 최소 몇천만원 더 나올 것이 확실했지만 그래도 본봉이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성과급은 시황에 따라 변하니까. 협상을 하며 제안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날 혹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현대자동차는 자동차 기업이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기업이다. 이직을 통해 나의 경쟁력 확인도 좋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회사가 망해도 내가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현대자동차 경력은 다른 회사 입장에서 삼성전자보다는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었다. 주변인들의 조언을 듣기도 하고 홀로 생각을 거듭하여 3년이라는 나의 낮은 경력 때문에 파격적인 오퍼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자동차로 옮길 것이면 차라리 8년의 경력을 쌓고 책임연구원급으로 이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수렴했다. 그래서 결국 입사를 포기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열심히 다니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느낀 것은, 삼성전자의 복지가 꽤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는 볼멘소리 위주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삼성전자는 돈은 많이 주는데 복지는 좋지 않은 회사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다른 회사들과 항목을 하나씩 따져보면 삼성전자의 복지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차량 할인과 휴일이 더 많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지만, 삼성전자는 월 1회 조건부로 출근을 면해주는 패밀리데이가 있었고 개인연금 지원 제도가 더 훌륭했고 셔틀버스와 사내 식당 부분에서 훨씬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두 회사의 복지 수준은 종합적으로 엇비슷하다는 것이었고, 삼성전자도 꽤 훌륭한 복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회사를 더 열심히 다닐 맛이 났다. 과장 조금 보태면, 뼈를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과급은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며.
링크드인에서 알림이 왔다. 작년(2023) Layoff 이후로 잠잠했던 퀄컴(코리아)에서 사람을 뽑는단다. 실제 뽑는 인원이 소수인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1년 만에 채용을 재개했다. 그리고 내가 해왔던 업무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6~7할 정도는 적합한 포지션이 열렸다. 퀄컴의 한국 R&D의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국내에 위치한 대기업 팹리스 중 가장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에, 링크드인에서만 수 십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 공고가 원하는 4년 이상의 경력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다. 8년 이상이라던 현대자동차도 해냈던 나였다. 개의치 않고 지원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기대도 안 하고 있었다. 연차도 한참 모자라고, 업무의 Fit도 아주 높게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콧대 높은 퀄컴이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나를 붙여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인사팀에게 메일이 왔다. 면접 일정을 조율하자는 영어로 된 메일이었다.
외국계의 면접 프로세스라면, 정형화된 것이 없어서 일반화할 수가 없다. 심지어 같은 포지션의 경우에도 프로세스가 달라질 수 있다. 나의 경우, 인사팀(HR)이 이력서를 보고 한 번 거른 후, 1차 인터뷰로 채용 후 일할 팀의 직속 매니저가 채용 매니저가 되어(Hiring manager) ‘스크리닝(Screening) 인터뷰’를 한 시간 동안 진행했다. 이 스크리닝을 통과한 후, 같이 일할 실무자들과 한 명당 한 시간씩 면접을 봤다. 몇 명이 될지는 랜덤이고, 나는 3명이었다. 스크리닝까지 하면 퀄컴에서 총 4명과 4시간의 면접을 봤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1차 스크리닝 면접을 봤다. 면접을 보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이 매니저의 지식수준이 정말 높다는 것이었다. 내 분야는 UVM이라는 언어로 테스트 코드를 짜는 것이 중요한데, 매니저급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UVM의 근본적인 동작 원리를 물어볼 줄 몰라 당황했다. 굉장히 기술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답한 것도 있고 답 못 한 것도 있었다. 대답을 못 할 때마다 정답을 설명해 주는데, 파생된 개념까지 술술 나오는 그의 설명에서 높은 견식이 느껴졌다. 미국 회사니 당연히 영어로 된 답변도 요구받았다. 그리고 면접 말미에 코멘트를 받았다.
채용 매니저: "연차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영어도 잘하시네요. 다만, 현재 열린 포지션에 비해 연차가 좀 낮은 게 걸리긴 합니다.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2차 면접 일정이 잡혔다. 2차 면접은 한 주 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였다. 그 1주 동안 스크리닝에서 잘 답변하지 못했던 UVM의 동작 원리를 더 자세히 파헤쳤다.
스크리닝 인터뷰는 매니저와 나의 대화 흐름에 따라 질문이 바뀌는 유동적인 면접이었다면 2차 면접은 퀴즈를 푸는 방식이었다. 3명의 각기 다른 실무자가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퀴즈 문제를 들고 왔다. 그중에는 IQ 테스트와 비슷한 것부터 시작해서 당연하게도 UVM의 동작 원리, 전체적인 칩 검증 흐름 그리고 내가 어떤 경험이 있는지 (Skill set)에 관해 물어봤다. 현대자동차와 면접과의 차이라면, 나와 같이 일하게 될 실무자와의 1대1 면접인만큼 퀄컴 면접이 더 기술적으로 파고들었다.
1시간마다의 라운드마다 내가 면접을 어떻게 본 것 같은지 물어봤다. 나름의 전략이었는데, 잘 본 것 같다고 하면 그 면접관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냄으로써 자기 확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매하다 또는 못 봤다고 하면, 왜 못 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이니 남은 1~2분 동안 그 부족한 부분을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차 면접 첫 번째 면접관: "연차에 비해서는 훌륭하고, 전체 지원자로 봤을 때도 이 정도 레벨이면 지금까지 본 다른 지원자들 사이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입니다"
2차 면접 두 번째 면접관: "아는 건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질문을 드린 거의 답변만 주려고 하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아쉽네요. 이번에 안 되더라도 다른 기회가 있으니까요. 이직은 사실 운이 대부분입니다."
2차 면접 세 번째 면접관: "이 정도 연차에서 이 정도면 꽤 많이 아는 것 같아요. 근데 이직은 사실 운이 대부분이니까 안돼도 실망하지 마세요."
운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ㅎㅎ 떨어져도 실망하지 말라는 뜻에서 해준 말이었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참 불안했다.
기술적인 답변에 대한 평가는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연차에 대한 걱정에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어필을 했다.
나: “연차는 비록 낮지만, 빠르게 습득하여 연차 이상의 역량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공수표를 던졌다. 이게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ㅎㅎ
3주 뒤 또다시 영어로 된 메일이 왔다. 면접에 합격했으니 연봉 협상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퀄컴에서 제시한 연봉이 아주 마음에 들어 (ㅎㅎ..) 연봉협상이 꽤 수월하게 진행되어 일사천리로 입사 날짜가 잡혔다.
막상 나가려고 퇴직의사를 밝히니 기존 회사에서 여러가지 당근을 줘서 혹할 뻔 했다. 어떤 매운 향신료가 들어가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맛보다 알고 있는 익숙한 맛의 개선된 버전이 나를 유혹했다.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칩 설계/검증 분야에서 내 입지를 다지려면, 그 분야 최고 회사에서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퀄컴에서 내 두 번째 커리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