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입대 4일을 남겨두고 블로그에 1년전 여행기 포스팅을 할 줄이야! 친구들과 한잔 해야하는 날들이지만 여의치 않네요. 질질 끌어왔던 유럽 여행기나 마저 완결 내야겠습니다.
사실 런던은 그리 기대하고 있던 도시는 아니였습니다. 여행 전에 가장 기대했던 도시는 질서의 나라 독일의 뮌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런던에 가장 많은 일정을 할애한 이유는 초등학교 때 부터 고등학교 때 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배워왔던 영어를 많이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별 이유 없이 런던 일정을 5일이나 잡아놨는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되었네요. 런던은 지금껏 여행해본 도시 중 으뜸이었습니다.
파리에서까지 여행은 정말 혼자였습니다. 간혹 '유랑'에서 만난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 끼니를 혼자 해결하고 관광지도 혼자 둘러봤습니다. 분명히, 혼자 하는 여행은 매력있습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홀로 여행이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혼자만의 여행은 또 가고 싶으니까요. 동행자의 성격,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긴 시간을 여행하다보니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을 혼자 보기보다 옆에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쁨이 배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도시 런던은 한인민박을 예약했습니다.
영국의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테러에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한국인에게도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코치코치 캐묻니 말입니다. 죄인이 된 마냥 입국심사를 통과한 뒤 기차에 탑니다. 적막한 해저터널을 뚫고 유로스타는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세인트 판크라스(Saint Pancras)역 근처의 아파트였습니다. 런던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커플이 운영하는 민박이었습니다. 런던의 물가와 더불어 집값이 참으로 살인적이기 때문에, 유학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운영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같은 방에 묵게 된 분들과 동네 펍에 갔습니다. 거기서 마신 기네스 흑맥주.
기네스를 처음 마셔보는 것 이전에 한번도 흑맥주를 시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네스의 본고장 아일랜드는 아니지만, 같은 영연방이기에 기분내서 한번 시도 해 봤습니다. 당시에는 흑맥주 특유의 짭조롬한 향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맥주 중 하나입니다.
숙소에서 같이 동행했던 분들은 다들 독일 본 대학교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재밌게도 한명은 일본인이었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을 따라서 여행을 왔더군요. 저와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두번째 날입니다. 흐린 날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런던인데 운 좋게도 화창한 날이었네요. 아침에 영국의 대표 음식인 피쉬 앤 칩스를 먹었습니다. 흐린 날씨와 더불어 몹쓸 음식으로 유명한데, 피쉬 앤 칩스 만큼은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만, 가격이 런던 답게 한화 만원 정도 했던 것 같네요.
이날은 혼자 런던 구경을 실컷 하는 날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대영 박물관. 세계 각종 나라에서 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네요. 전체적인 구성은 루브르 박물관이 더 흥미로운 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예쁜 기념품들이 많아 무려 유럽 여행 첫 기념품을 여기서 샀습니다. 그마저도 대단한걸 산건 아니고 머그컵을 샀는데, 물론 사진은 없습니다.
박물관을 나서는 길에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하더군요. 대충 기억하기론 "호주의 원주민들이 남긴 유물들은 호주에 전시되어 후대에 보여져야하는데 왜 이 유물들이 영국에 있어야 하느냐. 반환해라!"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대영 박물관장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며 안일한 태도를 문제삼은 작지 않았던 이 퍼포먼스는 이목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퍼포먼스가 버젓이 대영 박물관에서 행해져도 경찰들이 애워 쌀 뿐, 제제를 하지 않는 점이 "이 것이 민주주의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돈주고도 구경하기 힘든 무대를 관람한 후, 다음 목적지는 테이트 모던 타워입니다. 런던의 풍광 하나하나의 느낌이 너무 좋아 모든 장소는 걸어서 이동했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런던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다리를 건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찍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사진을 보아도 시원스럽게 찢어진 구름들로 찬 하늘을 보면 뭔가 후련해집니다.
템즈 강이 보이게도 한 장 찍어놨네요. 물이 썩 깨끗해 보이진 않네요.
테이트 모던 타워를 가는 길에 참 많은 길거리 악단들을 마주쳤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가끔 홍대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지만 한 번도 눈길을 줬던 적이 없었습니다. 날씨도 좋고, 도시도 너무 아름답고, 기분도 좋으니 저절로 길거리의 선율에 발걸음이 가더군요.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길거리 악단에게 동전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도착한 테이트 모던 타워 꼭대기 층의 카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옆에 처자 둘이서 재미있게 말하고 있길래 용기내어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기분좋게 받아주더군요. 벨기에 여행객들이었는데 이런 저런 여행담을 들었습니다.
테이트 모던 타워 구경 후 런던의 유명한 시장을 가는 길입니다. 아쉽게도 휴일이라 다들 문을 굳게 닫았더군요.
길을 가다가 해리포터에서 본 듯한 너무 예쁜 거리가 있어서 찰칵했습니다.
이렇게 두번째 날은 끝이 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밤에 숙소에서 사람들과 맥주 한잔 했던 것 같네요.
세번째 날은 날이 밝자 마자 뮤지컬을 예약하고 숙소 사람들과 같이 비틀즈 관련 명소들을 갔다 왔습니다. 비틀즈 팬이라면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애비 로드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찍은 분에게 사진 달라고를 안했네요. 비틀즈 투어 후에 시장에 가서 열쇠고리도 사고 그 유명하다는 쉑쉑버거도 먹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사진이 단 한장도 없네요. 노점에서 열쇠고리를 샀는데 바로 옆 노점에서 같은 열쇠고리를 절반 가격에 팔더군요. 산지 5분도 안된 시점에서 다시 돌아가 환불할 수 있냐고 하니 갑자기 옆에서 문신한 덩치가 와서 안된다고 하더군요. 환불이 안된다고 해도 납득하려고 했었는데 덩치 큰 문신쟁이를 불러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빠 일부러 더 실랑이를 벌이다 나왔습니다. 사실 조금 무서웠지만 설마 여행객을 해치겠습니까.
날이 어두워지고, 예약했던 뮤지컬을 보러 갔습니다. 관람한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을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뮤지컬의 본가까지 왔는데 이런 경험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본 것인데.. 생각보다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에도 오페라의 유령 노래들을 넣어다니며 흥얼거립니다. 직접 뮤지컬을 관람했을 때의 그 전율은 물론 없지만요. 다른 뮤지컬을 못 보고 온게 한입니다.
뮤지컬을 보고 나와 찍은 거리 사진입니다. 아마 여기가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역이었을 겁니다.
즐겁게 뮤지컬을 관람하고 나서 맥주를 한가득 들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주인 분이 골뱅이 무침을 해주셨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골뱅이 무침중에서 가장 맛났습니다. 이렇게 셋째 날을 마감합니다.
숙소에 머물던 분들이 하나같이 세븐시스터즈는 꼭 가야한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봤기 때문에 또다시 '유랑'의 힘을 빌려 새 일행을 구했습니다. 네번째 날은 새 일행과 계속 함께했습니다. 밑은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 가는 길에 찍은 기차역입니다. 사진을 업로드하면서 계속 생각이 드는게, 비틀즈 명소같은 여행 사진은 안찍고 참 쓰잘데기 없는 것만 많이 찍어놨네요.
두시간 가량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세븐 시스터즈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며 단일 장소로서 압도적으로 사진을 가장 많이 찍은 곳입니다. 해안가로 가는 길입니다.
가는 길에 갈대밭과 호수, 양들이 있습니다.
애들이 연도 날리네요.
정말로,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길이었습니다. 해안가 까지 가는데 적지 않은 거리이었음에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걷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바닷가. 어떤 수식어를 붙여놔도 직접 가보는 것만 못합니다. 자연경관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큰 감동을 받아본 적은 없었습니다.
언덕에 올라가서 또 찍었습니다. 이 광활함은 사진으로 다 담을 수가 없네요.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입니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세븐 시스터즈에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런던에서 15년 째 살고 있는 한국 중년을 만납니다. 행복을 좇아 좋은 직장을 뒤로하고 런던으로 이민 온 이 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감동의 연속이었던,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절로 좋아졌던 세븐 시스터즈를 뒤로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더운 한여름에 털모자를 뒤집어쓴 왕실 친위대가 근무하는 곳에 갔는데 여기가 어딘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광장입니다. 유럽 나라들은 곳곳에 광장이 있는데 만남의 장소로서 많이 이용하는 것 같더군요.
여행 통틀어서 몇 안되는 음식 사진입니다. 마지막으로 일행들과 먹었던 바닷가재 요리입니다. 비싼 만큼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끝으로 이렇게 넷째 날은 끝이 납니다. 다음 날 일찍이 히드로 공항으로 출발하는 길에 홍콩 할아버지가 젊은 동양인 남자 혼자 지하철을 타는 것이 신기했던지 저에게 말을 걸어서 지하철에서 심심하지 않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홍콩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끝으로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유럽 여행을 하며 백 번도 넘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토종 한국인인 저에게는 낮선 것들 투성이었으니까요. 대부분의 경우, 도움을 요청하면 성심껏 도와주지만 가끔씩은 귀찮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일지 몰라도, 런던에서 도움을 청하려고 '실례합니다'를 말하기 직전마다 사람들이 먼저 와서 자기일인 것 마냥 친절하게 도움을 줬습니다. 런던에서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와 독일에서 느꼈던 불쾌한 시선도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좋을 수 밖에 없었던 경험입니다.
1년이 지났지만, 런던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하나 둘 씩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게 정말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런던은 정말 멋진 도시입니다. 말로 해서는 모릅니다. 파리나 로마가 옛 느낌이 많이 남아있고 뮌헨은 현대적인 느낌이 많이 묻어있다고 한다면, 런던은 말 그대로 도시 구석구석이 옛 것과 현대의 것이 잘 조화로이 어우러져있는, 공존의 도시입니다. 하지만, 런던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 주는건 도시 외관 뿐만이 아니라 즐거운 뮤지컬이나 친절한 사람들과 같은 문화적인 면이 아닐까요?
여행기를 완결하는데 10개월이나 걸렸네요. 열린 마음으로 서양 문화를 경험한다면, 말 그대로 '견문'이 넓어집니다. 슈퍼마켓에서 줄지어 사람들이 기다리는데도, 점원은 문자를 기어이 보내고서야 계산을 재개합니다.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은 약속된 시간 이전부터 영업을 멈춥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이런 답답한 놈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도의 점원을 보면 유럽 사람들의 일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 노동은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모두가 공감하고 존중해 줍니다. 유럽 여행 동안 내가 과연 수단과 주체를 제대로 구분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또 과연 유럽 사람들의 이런 삶의 태도가 정답인건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젠 '수단'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주체를 잊어버리진 않을겁니다.